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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들의 은밀하면서 대담했던 성(姓)생활 - 동성애 본문

기묘한 스토리

궁녀들의 은밀하면서 대담했던 성(姓)생활 - 동성애

세-모-이 2021. 2. 5. 07:00

궁녀는 왕만 취할 수 있는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왕의 눈에 들어

승은(동침)입는 경우에만

비로소 진정한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궁녀가 수백이나 있었던

궁궐 안에서 왕의 간택을 받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대다수의 궁녀들은 남녀 관계에

대한 어떠한 즐거움도 누리지

못한 채 평생 수절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조선시대에는 일부 궁녀들의

동성애가 암암리에 성행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후기

영조3년(1727)에 

'조현명'이 올린 상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록되어 있습니다.

 

"예전부터 궁인들이 대식(食)을

핑계 삼아 천한 비구니나

과부와 안팎으로 통정(情)하오니

궁 출입을 준엄하게 하여

그들의 왕래를 끊으소서."

 

여기서 대식(食)

궁녀들의 동성애를 의미합니다.

 

 

원래 대식(食)은 궁녀들이

가족이나 친지를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같이 식사하는

제도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일부 궁녀들의 일탈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습니다.

 

 

참고로 조선 초기인 세종 시절에도

대식 사건이 여러 건 발각되었지만

근절되지 않았고, 조선 후기인

 

 

영조 시대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궁녀들이 얼마만큼 오랫동안

은밀하게 대식(食)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녀들의 일탈은 대식(食)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신록에는 궁녀가 왕이 아닌

다른 남성을 사모하거나

심지어 임신까지한 충격적인

건이 꽤나 등장합니다.

 

세종 26년 작성된 의금부의

보고서에는 궁녀 '장미'가

 

 

병을 핑계로 친정으로 간뒤

사내들과 놀다 발각된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는 남성들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놀았는데 그 중 한 남성과

일종의 연애를 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데이트를 즐겼지만

불행히도 장미의 신분 때문에

발각되었고 결국 이들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상대 남성은

귀양을 가게 됐고' 궁녀 '장미'는 

참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현종 8년에는 궁녀가

임신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왕대비전의 궁녀인 '귀열'의

배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불러왔고 왕은 그녀의

 

 

임신을 보고받자마자

귀열을 감옥에 가뒀습니다.

 

얼마후 그녀는 감옥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놀랍게도

아이의 아버지는

귀열의 형부였습니다.

 

 

형부와 처제의 간통은

당시 교수형 해당하는

중죄였으나 왕은 인륜을 배반한

이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며

형을 높여 귀열을 참수에 처했고

 

 

귀열의 부모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장을 때리고 귀양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불륜 당사자인 귀열의

형부는 종적을 감춰버려

끝내 잡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궁녀들의 외로운 삶은

심지어 출궁을 한다해도 결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궁녀들은 입궁할 때부터

이미 왕의 여자가 된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출궁한 몸이 될지라도

여전히 혼인은 불가능했습니다.

 

 

참고로 세간에 알려진 사실로

궁녀는 죽을 때까지 궁을

떠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국가적 재난의 

원인을 혼인하지 못한 처녀들에

돌리고 젊은 궁녀들을

궁 밖으로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실 예로 영조 26년에는 무려

45명의 궁녀가 지독한 '가뭄'을

이유로 궁 밖으로 방출됐습니다.

 

 그렇게 출궁된 궁녀들 몇몇은 

목숨을 바쳐 '정절'지키기도

했는데,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이런 궁녀 이씨에게 '수칙'이란 작위와

'정렬'이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그 내막을 더 들여다보면

10살 정도 나이에 입궁한

이씨는 원인은 분명치 않지만

출궁을 겪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10여년 동안

거의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서

칩거 생활을 하다 결국 자결로 

생을 마쳤고 나중에 이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정조는

궁녀 이씨를 가상하게 여겨

정문을 세워 주고 작위와

칭호를 내려 주었습니다.

 

이처럼 궁녀들의 삶은 쓸쓸함을

넘어 가혹하기까지 했습니다.

 

보통 네다섯살의 나이에

궁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입궁 한 지 15년이 지나

정식으로 궁녀가 된 다음에는

궁 안에서 평생을 왕을 위해

수절에 하는 모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왕만을 바라보는

'왕바라기'들이었고, 그렇게

궁궐안에 심어진 수백송이의 꽃들은

피어나지도 못한 채 가혹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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